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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역사 ---- 신라불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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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차돈의 순교와 불교공인 이차돈의 순교는 우리 나라 불교사에서 가장 높이 평가받아야 할 종교적 사건으로서, 신라 불교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이미 그 시초부터 찬란한 빛을 발현시키기 시작했다. 이차돈의 순교 사건에 대한 설화는 다음과 같다. 이차돈은 지증왕 7년(506)에 태어났으며,성은 박씨요, 이름은 염촉(厭 )이며, 거차돈(居次頓)으로도 불리었다. 그의 아버지는 길승(吉升), 할아버지는 공한(功漢), 증조할아버지는 흘해왕(訖解王)으로 되어 있다. 이차돈은 어려서부터 베풀기를 좋아하여 주위 사람들의 신망을 받았으며. 일찍부터 불교를 신봉하였으나 신라에서 국법으로 불교가 허용되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때마침 법흥왕도 불교를 백성들에게 알리고, 불력(佛力)에 의해 국운을 번영시키고자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으나 신하들의 강력한 반대로 말미암아 뜻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법흥왕은 신하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짐은 즉위할 때부터 만백성을 위하여 복을 닦고 죄를 없앨 수 있는 불찰(佛刹. 불교사 찰)을 짓고자 하였노라. 이제 절을 창건하려 하노니,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고?"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는 예상외로 강하였다. "근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생활은 불안하고, 더욱이 인접한 나라의 병사들이 국경을 자주 침범하여 군사들은 쉴 사이도 없사옵니다. 이러한 어려운 때에 백성들을 동원하여 쓸모 없는 사찰을 짓는다는 것은 당치 않사옵니다." 왕은 신심(信心)이 없는 좌우의 중신(重臣)들을 둘러보며 측은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다 가, 자기의 부덕(不德)을 탓하면서 홀로 탄식하였다. "아! 만백성들에게 편안한 삶을 안겨줄 불교를 펴고자 함이나, 나의 부덕한 소치로 찬 성하는 이 없으니, 누구와 더불어 이 일을 같이 할꼬? 그 때 법흥왕의 뜻을 헤아린 이차돈이 찾아와서 아뢰었다. "대왕이시여, 완고하고 교만한 중신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됩니다. 대왕께서는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를 들어 저를 처단하십시요. 틀림없이 부처님의 뜻에 따라 하늘과 땅에서 기이한 변고가 일어날 것이옵니다. 그렇게만 되면 누가 또다시 반대를 하겠습니까?" "너의 할 일이 아니다."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법흥왕을 향해 이차돈은 거듭 간절히 아뢰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바른 뜻입니다. 신에게 왕명을 거짓되게 전한 죄를 내려 신의 머리를 베이시면. 만백성이 다 굴복하여 이 후로는 어느 누구도 왕명을 거역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염촉아. 부처님은 과거 전생에 새 한마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살을 베어 주었고, 피를 뿌리고 생명을 끊으면서까지 뭇 생명들을 구하여 주었느니라. 내가 불법을 펴고자함도 사람들에게 이로움을 주고자 함이거늘, 어찌 죄없는 너를 죽일 수 있겠느냐? 네가 죽어 큰 공덕을 지을 수 있다 할지라도 죄는 피하는 것이 좋겠다." "아니옵니다. 대왕이시여.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버리기 어려운 것이 목숨(身命)이지만, 이 몸이 저녁에 죽어 아침에 대교(大敎. 불교)가 행하여진다면, 하물며 부처님의 해가 영원히 밝혀지고 이 나라가 길이 평안하다면, 저의 죽는 날이야말로 다시 태어나는 날이 아니겠습니까?" "네 비록 포의(布衣)를 입었지만 마음 속은 비단과 같구나. 네가 그렇게만 해내면 가히 보살의 행위라 할 것이다." 크게 감격한 법흥왕은 이차돈과 함께 크게 불법을 펼 것을 굳게 맹세 하였다. 마침내 사인(舍人) 벼슬에 있던 이차돈은 천경림(天鏡林)에 절을 짓기 시작하였고, '이차 돈이 왕명을 받들어 절을 짓는다,' 는 소문은 삽시간에 서라벌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신하들은 크게 흥분하여 왕에게 다투어서 물었다. 법흥왕은 자신이 영을 내린 것이 아니라 하고. 이차돈을 불러들여 문초하였다. "절을 지은 것은 부처님의 뜻에 따라 소인이 한 일이옵니다. 불법(佛法)을 행하면 나라가 크게 편안해지고 경제에도 유익할 것이오니. 국령(國令)을 어긴다 한들 무슨 죄가 되겠 습니까?" 주위의 신하들은 발끈하였다. "지금 승도(僧徒)들은 보건대 어린 아이들과 같은 머리에 다 떨어진 옷을 입고 허황되기 짝이 없는 말만을 하니. 이 어찌 정상적인 도라고 하겠습니까? 만약 이차돈의 말을 그 대로 좇는다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신들에게 죽음의 죄가 내려진다 한들 이 것 만은 따를 수 없나이다. 하물며 이차돈은 왕명을 그릇 전하였으니 엄한 벌로 다스려 야 하옵니다. " 그 때 이차돈은 분기 띤 음성으로 외쳤다. "대왕이시여. 군신들의 말은 옳지 않사옵니다. 무릇 비상(非常)한 사람의 뒤에는 비상한 일이 따르기 마련이옵니다. 불교는 매우 심오하여 따르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어찌 제비가 기러기의 큰 뜻을 알 수 있겠나이까?" 신하들의 반대는 더욱 커졌고, 법흥왕은 이차돈과 미리 상의한 대로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반대하고 있는데 오직 너만이 옳다고 하는구나. 두 의견을 다 따를 수는 없다. 이차돈을 참(斬)하여라." 왕명을 받은 하리(下吏)가 목을 베기 직전. 이차돈은 법흥왕께 간곡히 아뢰었다. "저는 이제 진리를 위해 기꺼이 형을 받나이다. 바라옵건대 대왕이시여. 의리(義理)를 일으키소서. 부처님이 신령하시면 제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적(異蹟)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 이차돈은 하늘을 우러리 보며 마지막 기도를 하였고, 하리는 그의 목을 베었다. 순간, 머리는 날아 금강산(金剛山) 꼭대기에 떨어졌고, 잘린 목에서는 흰 젖이 수십 장(丈)이나 솟아올랐으며, 갑자기 캄캄해진 하늘에서는 아름다운 꽃이 비오듯 쏟아졌고 땅은 크게 진동하였다. 군신들은 서로 부등켜 안고 자기들의 어리석음과 우둔함에 통곡하였으며, 법흥왕은 불교를 국교(國敎)로 공포하였다. 이 때가 이차돈의 나이 22세 (또는 26세)인 527년(법흥왕 14)이었다. 이차돈의 순교는 신라의 만백성들이 마음껏 불교를 믿을 수 있는 자유를 안겨다 주었고, 그의 순수한 순교의 정신을 가슴으로 받아들인 신라인들은 위대한 신라불교의 불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죽음을 통한 새로운 탄생. 이것이 신라불교를 영원히 빛나게 만든 것이다. 법흥왕은 불교를 통해서 백성들이 선량한 민본주의 관념을 가질 수 있고, 신라의 문화가 향상 발전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으며 뒷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법흥왕에 의해서 시작된 신라불교가 신라 풍토에 알맞은 불교로 정착하게 된 것은 진흥왕부터 이며, 이것은 왕 자신의 신앙심과 불교 정책에 의해서였다. 진흥왕은 재임 37년 동안 한마음으로 불법을 신봉하였고, 그때까지 삼국 중에서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를 삼국통일의 주체국으로 만든 것이다. 진흥왕 5년에는 선왕(先王) 때부터 짓기 시작한 흥륜사(興輪寺)가 낙성되고, 그해 3월에는 뜻 있는 자에게 승려의 길을 열어줘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게 하였다. 말년에는 왕 자신도 출가하여 법운(法雲)이라 이름하고 수도하였으며 왕비도 영흥사(永興寺)에 들어가 여승이 되었다. 왕은 또 불교이념에 의한 수양단체인 화랑도를 창설하여 신라 청소년의 윤리를 종교의 깊은 곳으로부터 배우게 하는 등 백성들의 정서 함양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화랑도는 불교 사상을 근간으로 설치된 청소년 수양단체로 진흥왕이 나라를 흥하게 할 목적으로 불교의 미륵신앙과 이상국가 사상인 전륜성왕 사상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룩한 것이다. 따라서, 이 단체에서는 신라의 미륵을 상징하는 국선(國仙)이 모든 무리를 통솔하고, 그 아래에 각각 소 단체의 우두머리인 화랑이 있어서 자기 무리의 낭도(郎徒)를 거느렸으며, 또 낭도에는 일반 소년 낭도와 달리 한 사람의 스님이 낭도로 있으면서 국선을 보좌하였다. 이와 같이 화랑단체는 불교적인 사상이 뒷받침된 것이다. 불교가 신라문화에 적응한 예를 원광법사의 세속오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나라에 충성하고, 둘째 부모에 효도하며, 셋째 벗을 믿음으로 사귀고, 넷째 싸움터에서 물러서지 말며, 다섯째 산목숨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절대 살생을 금하고 있는데, 원광은 살생을 하되 가려서 하라고 했으나 불교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신라인이 불교의 참뜻을 새롭게 수용한 과정으로 그 시대의 삶과 앎이 깊은 관계를 맺은 포괄적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신라는 제30대 문무왕 때에 삼국통일을 이룩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하였는데, 이에 따라 불교도 크게 융성하여 신라의 승려가 당나라에 가 그곳의 불교 교학을 배워 왔다. 따라서 신라는 우리 나라 불교사상 유례없는 황금시대를 가져왔고 수많은 학승이 배출되었다. 신라불교는 대승의 종파와 교학이 크게 일어나게 된 이때를 전기로 처음에는 학해불교(學解佛敎), 다음에는 실천활동으로서의 선불교가 유행하였다. 특히 중국의 달마선(達摩禪)이 전래 성행하던 때를 후기로 나누고 있다. 35대 경덕왕 때까지 활발했던 신라불교는 그 후 침체되어 갔다. 이 무렵에 식지인심 불립문자(直指人心, 不立文字)를 표명한 선불교가 중국에서 들어왔다. 이 새로운 선풍은 중국에서 보리달마(菩提達摩) 이래의 종풍이 확립되어 독특한 선종으로 성립 ·발전된 것이다. 중국의 선종이 6조 혜능(慧能)에 이르러 남. 북으로 나뉘면서 그 기세를 떨칠 무렵 신라 학승들이 선법을 배워 왔다. 북선은 흔적만 남을 정도로 미미했지만 6조 혜능의 남선은 크게 일어나 신라의 선종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 전해진 선법은 6조의 후손들에 의해 발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첫 전법가도의(道義)는 선덕왕 5년에 당으로 가서 마조 도일(馬祖 道一)의 제자 서당 지장(西堂 智藏)에게서 법을 얻고 헌덕왕 13년에 귀국하여 선법을 일으키고자 했으나 신라에서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마의 말이라고 거부하였다. 따라서 도의는 설악산에 은거하여 그 법을 제자 염거(廉居)에게 전하고 염거는 다시 체징(體澄)에게 그 법을 전하였다. 이렇게 하여 구산신문(九山禪門)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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