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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역사 ---- 신라불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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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신라의 여성불교 (삼국유사) 권3 아도기라에 의하면 불교의 최초 여성신도는 모례<毛禮)의 누이동생 사(史) 씨였다고 한다. 아도가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하여 일선현(지금 선산) 모례가에 왔다. 당시 아도는 지하 종교활동만 하였을 뿐 공개 전도는 할 수 없었는데 이때 사씨가 귀의하여 신불의 증험을 나타냄으로써 마침내 비구니가 되어, 삼천기에 영흥사를 지었다고 전한다. 사씨가 창건한 영흥사는 공인전에 세워진 사사로운 당우였지만 이로써 신라 비구니 국찰인 영흥사로 이어질 법연을 맺은 것이다. 법흥왕은 불교의 전파와 새로운 국가형태를 갖추는데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왕의 뜻에 계합한 왕비의 정성도 큰 공헌을 했다. 불교를 국교로 내세우려고 이차돈의 순교까지 초래한, 외형적인 법흥왕의 신앙의 뒷면에는 내면적으로 자기 신앙을 참되고 티없이 드러낸 법흥왕비 묘법의 열렬한 신앙심이 있었다. 이렇듯, 삭발의 결의를 내리고 영흥사를 창건하여 불교전교에 일생을 바친 것으로 보아, 법흥왕과 요법은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한 보살의 화현인 듯한 인상을 갖게 한다. 신라의 최고 권좌에 위치한 왕과 왕비의 신앙이 귀족사회나 서민사회 즉 신라 전역에 불교를 파급시켜 국교로 신장할 여지를 넓혀 준 것이다. 법흥왕 뒤에 즉위한 진흥왕(540~576)도 불심이 돈독한 왕이었다. 진흥왕 5년에는 선왕 때부터 역사하던 흥륜사가 낙성되고 동년에는 남녀에게 출가하는 것을 국법으로 허락하였다. 법흥왕의 조교(肇敎) 에 의하여 진흥왕은 국법으로 비구니의 출가를 허락한 것이다. 이처럼 신라는 전래 초기부터 불교를 공적인 종교로 수용하는 데 부단히 마음을 기울였다. 진홍왕의 왕비도 마침내 영흥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진평왕(575~632) 때 안홍사의 비구니 지혜(智慧)는 선도산 성모의 몽유에 의해 불전을 수리하고 매년 봄(3월). 가을(9월)에 선남 선녀를 모아 일체 중생을 위하여 점찰법희를 배푸는 것을 항규로 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 권5 감통7 <선도성모수희불사조>에 있는데, 이것은 성모신앙과 점찰법회의 영합을 뜻하는 것으로 원광도 가슬 갑사에 점찰보를 두어 상규로 삼았다. 이때에 시주하던 여승이 점찰보에 밭을 바쳤는데,1백 결이었다(삼국유사 권4, 의해5 원광서학). 비구니 지혜가 <점찰경>으로 점찰법회를 관장하였다는 사실은 그 당시 이름 높은 승려였던 원광이 가실사에서 점찰법회를 베푼 것과 견줄 수 있으며 비구니로서 점찰법회를 연 것으로 보아 여승의 위치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왕비의 출가에서 알 수 있듯 신라 비구니의 위계는 비구에 못지 않았다. 신라 상위계의 여성이 출가하였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신라 사회가 여승을 낮추어 보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비구니 지혜가 매년 봄, 가을에 선남선녀를 모아 일체 중생을 위하여 점찰법회를 베푸는 것을 항규로 삼으려면 종교적인 조직력과 함께 국가적인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편, 출가하지 않은 재가자의 신앙도 출가자 못지않게 열렬하였다. 재가자의 봉불은 재산의 헌납과 노력의 신력 헌공으로 양분할 수 있다. 신력 헌공도 사예(寺隸)로 헌신하는 것과 사원건축이나 조상 등의 불사에 나아가 도와주는 것이 있다. 사예는 법흥왕이 궁척을 내놓아 사예로 삼은 것이 처음이다. 스스로 사예의 길을 달게 받아들인 신라 여성의 종교열은 현실고를 극복하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매진하게 하였고 사예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저주나 곤욕스러움 없이 활동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신라 여성들이 참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일면이라 할 수 있다. 양지(良志)스님이 영묘사(靈廟寺)에 장록불상을 조성할 때 '성중의 남녀가 다투어 진흙을 날랐다'고 한 것도 신라의 남녀가 조상 불사에 노력봉사를 아끼지 않았음을 뜻한다. 여성 단원들의 노력 봉사 . 재산 헌납으로 지은 불교사원이 지금껏 유지되고 있다. 통일기에 이르러 신라가 부강해지자 사원에 대한 토지의 시납이 보편화되어 개인적으로 대찰을 건축히는 등 재산을 마구 사원에 헌납하므로 문무왕 4년(664)에 시납엄금의 영이 내렸다. 원광이 점찰보를 시행할 때 어느 재가 여신도는 100결의 전답을 내놓는 등 여성의 재산 헌납이 상당하였다. 사원건축만이 아니라 불상이나 범종의 조성도 대부분 여성 불자의 헌납으로 이룩되었다. 특히 상원사 범종의 시납자는 체도리라는 상류계급의 여성이었으며 현존하는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무거운 황룡사종의 시주자는 효정이왕 삼모부인이였다 효정이왕 삼모부인은 경덕왕의 왕비였으나 아기를 낳지 못한 이유르 폐비가 되어 사량부인(삼모부인의 이칭)으로 봉함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왕비의 신분으로 아기를 낳지 못한 불운과 고업을 벗어나려고 일심봉불한 나머지 황룡사 대종불사에 온 마음을 기울인 것이다. 또한 소성왕비 계화부인은 불상을 조성한 신녀였는데, <삼국유사> 권 3 탑상4, <무장사미타전조>에 의하면 소성왕(799-800)이 돌아가신 후 계화왕후는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왕후의 성복을 희사하고 구부에 저축하였던 모든 재물을 바쳤으며 그 재물로써 아미타불상 일구와 신중상을 만들어 무장사 미타전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경문왕 (景文王)의 누이인 의장옹주는 경문왕 7년(869) 원찰(願刹)인 현계산 안락사(安樂寺)에 토지와 노비문서를 기증하여 당시 안락사 주지였던 지증을 감격시킨 일도 있다. 이와 같이 신라시대의 불교신앙은 왕족과 귀족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서민에게서도 깊고 깊은 믿음을 찾아볼 수 있다. 가난한 빈녀의 신앙으로는 <삼국유사) 권5 <진정사효 쌍미조>와 김대성의 어머니에게서 엿볼 수 있다. 빈한하기 이를 데 없는 진정모자는 재산 중에 가장 귀한 것으로는 노구솥밖에 없었는데 이 노구솥을 어떤 스님의 철물 시주 때 헌납하였고, 김대성의 어머니인 경조부인은 끼니가 어려워 부잣집의 부엌일을 하면서 그 품삯로 얻은 땅을 절에 기증하였다. 또한 경덕왕대 아간 귀진가의 비 욱면은 주인을 쫓아 절에 가서 법당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서 염불을 드렸다. 이를 본 주인은 종이 어찌 부처를 염하느냐고 꾸짖으며 곡식 두 섬을 하루 저녁에 찧도록 하였다. 그러나 욱면은 부지런히 일하여 초저녁에 다 찧어 놓고 염불에 전념하기 여러 날 마침내 천상의 소리를 듣고 법당에 들어서게 되었으며 얼마 안 있어 지붕을 뚫고 솟아나며 불신으로 화현하여 연화대에 앉더니 방광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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