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역사 ---- 신라불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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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라불교의 대중성 왕실에 의하여 불교가 강력하게 지지, 발전하게 된 것은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불교가 적합하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귀족 세력과의 타협 없이는 불교가 수용 될 수 없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윤회전생의 사상은 귀족들의 특권을 인정해 주는 이론으로서 환영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즉, 불교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 국가의 사상체계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불교에 호국적인 성격이 강한 것은 당연한 이치로서 호국경으로 유명한 인왕경(仁王經)은 지극히 존중되어졌다. 그 예로, 인왕경의 설에 의해 백좌강회(百座講會)라는 국가의 평안을 비는 의식이 그렇고, 팔관회, 백제 왕흥사의 건립, 신라 황룡사의 9층탑 건립 등도 호국적인 의미를 가진 것들이다. 미륵불이 하생하여 화랑이 되었다는 신념도 이런 호국신앙의 표시였으며, 호국만이 아니라 아울러 불교를 수호하는 호법정신 역시 국가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삼국시대의 가장 중요한 종파는 계율종이었다. 백제의 겸익이나 신라의 자장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인데 특히 자장은 대국통으로서 신라의 불교를 총괄하였다. 승려들이 지켜야 할 생활 기준으로서의 계율을 강조하는 것은 종교를 통한 인심의 귀일이라는 정치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신라가 국통, 주통, 군통 등의 승관(僧官)을 두어 계율을 통해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통제한 것은 이와 같은 효과를 노린 것이다. 또 밀교가 크게 성하여 치병, 양병, 강용등의 기적을 행한 것도 그 당시 불교에 대한 관념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렇게 불교가 국가적 지위를 얻음으로써 승려들은 때로 정치적 자문의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고,문화적으로 중국문화 수입의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삼국시대에 중국에 유학하는 대부분은 승려였다. 그리고 이들은 국민의 정신적인 교사이기도 하였다. 즉 원광이 세속오계를 말하고, 화랑도에 승려가 참가하여 도의면의 교육을 담당한 깃은 그런 데에 착안한 깃이다. 이렇게 삼국시대의 불교는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존경과 믿음을 받는 종교로서 중대한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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