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역사 ----조선 초기의 선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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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의 선맥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조계종의 뿌리를 이해하는 일과 같습니다. 물론 조계종은 석가모니 부처님을 불조(佛祖)로 받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부처님의 제자들은 각각의 특성에 따른 수행과 정진을 해왔습니다. 이 각각의 수행과 정진의 특성이 한자리에 모아진 것이 종단입니다. 조선전기의 대부분은 숭유억불정책의 가혹한 탄압으로 종단이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에 구산선문이래 소위 산중 중심으로 사자상승(師資相承)하던 전통이 불명확할 정도로 희미해졌습니다. 가장 오래된 문서로 태고법통설(太古法統說)이 있습니다. 태고 보우(太古普遇)→환암 혼수(幻庵混修, 1320-1392)→귀곡 각운(龜谷覺雲)→벽계 정심(碧溪正心)→벽송 지엄(碧松智嚴)→천용 영관( 蓉靈觀,1485-1571)→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7)으로 선맥(禪脈)이 전승되었다고 보고는 있지만 귀곡과 벽계에서 벽송으로 이어지는 법통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귀곡이나 벽계의 생몰 년대도 의심스럽고, 벽계의 행적에도 문제가 있다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조선 전기의 불교교단은 철저히 유린 당하고 가혹한 상태 속에서 근근히 연명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청허휴정과 사명이 입적한 후 자기 문중의 정통성을 선포하려는 일환으로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나 중관 해안(中觀海眼, 1567-?)의 노력에 의해 나옹법통설(懶翁法通說)은 사라지고 태고법통설이 인정되기에 이른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의 뒤를 이은 함허 득통(涵虛得通, 1376-1433)은 세종 때 불교교단의 거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문하에 야부(野夫), 문수(文秀), 학미(學眉), 달명(達明), 지생(智生) 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 행적들을 알 수 없으므로 나옹법통설은 설득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한국의 불교는 법통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누구의 법을 이어 왔느냐 하는 것은 조상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법맥이 어떻게 이어져 내려왔는가 하는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청허 휴정으로 이어지는 법맥은 조선후기를 거쳐 근세 선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경허선사로 전해졌으며, 혜월·수월·만공·한암·용성·금오·동산·전강·성철스님 등 이 시대를 빛낸 선사들이 그 법맥을 계승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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