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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불교의 역사 ---- 통일신라 화엄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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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화엄사상

신라땅이 불보살의 상주설법도량으로서 연화장 불국정토라는 신라인들의 믿음과 사상은 바로 신라의 불교관이 화엄 세계임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 화엄사상은 신라가 통일을 완성하면서 더욱 특색있게 발전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왕실에서도 공존하는 새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모든 대립과 투쟁이 지양된 원융무애한 일승화엄사상을 적극 지원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통일 이전 삼론과 법상이 가진 중관과 유식사상적 대립도 모두 극복한 화엄은 그 후 한국불교의 특징인 통불교사상 즉 원융, 화쟁, 화합, 겸수 등 한국불교사상의 기저(基底)가 된다. 그러한 화엄사상의 전개는 무엇보다도 통일전쟁을 몸소 겪은 바 있는 원효와 의상의 저술활동과 실천적 교단운동에 힘입은 것임을 볼 수 있다. 화엄사상의 근거가 되는 『화엄경』(60화엄,418一420 역출)이 언제 처음 이땅에 전래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화엄 관계 최초의 기록에 의하면 승랑이 화엄에도 능통하였다 하나 그것은 중국에서의 일이고 화엄사 사적에 나오는 연기 조사도 8세기경 인물임이 최근 밝혀졌다. 따라서 자장(638一643 제당)과 원효(617 -687) 시대에 이미 화엄경이 전래되었다는 사실밖에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진흥왕 26년(565)에 진(陣)의 문제(文帝)가 경론 1700여 권을 보낸 일이 있으니, 화엄경도 아마 그때에 전해진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원효는 의상(625-702)과 함께 입당 유학을 꾀한 적도 있으나 그 이전에 이미 원숙한 화엄의 경지에 들어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도 있다. 원효가 입당하기를 그만두면서 읊은 오도송인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 (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이라는 삼계유심의 게송은 『기신론』의 일심세계이며 그후 원효의 사상은 기신론의 여래장사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기신론의 이론체계와 『금강삼매경』의 실천원리를 주축으로 하는 원효의 불교사상은 여래장사상이라기보다 오히려 화엄사상에 가깝다. 원효는 경전 중 화엄경에 대해서 가장 많은 저술을 하고 있으며(7부 15권) 그의 교화도 화엄경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일찍이 분황사에서 화엄경소를 짓다가 「십회향품에서 절필했다고 하며, 또 실계(失戒)한 후에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라는 문구를 박에 새겨 이 무애박을 두드리며 무애가를 부르면서 천촌만락을 다니며 교화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화엄사상을 일반서민에게 정착시키고자 한 원효의 노력이 보이며, 화엄으로 대중교화에 힘썼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원효의 화엄경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는 그의 사교관에서 읽을 수 있다. 원효는 모든 불교를 ① 삼승별교(사제.연기) ② 삼승통교(반야.심밀 ) ③ 일승분교(영락.범망) ④ 일승만교(화엄.보현)의 넷으로 분류하고 있다. 일승을 다시 분교(分敎)와 만교(滿敎)로 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분.만 2교를 결정하는 기준은 '보법(普法)'이다. 보법이란 일체법이 공간적, 시간적으로 또는 동정(動靜), 일다(一多) 등의 범주에서 아무런 걸림이 없이 상입(相入)하고 상즉(相卽)하는 화엄경의 세계를 말한다. 원효가 편 보법사상은 화엄사상에 해당하는 것이니, 보법화엄으로 일승사상을 완성시키고 있다. 이처럼 원효사상은 바로 화엄사상이긴하나 원효는 화엄의 원융사상으로 인해 화쟁(和諍)의 길을 열었다하여 화쟁국사로 일컬어지고 있다. 원효가 이처럼 국내에서 독자적인 화엄사상을 개발한 반면. 입당수학 당시부터 화엄행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의상은 지엄문하에서 화엄교학의 진수를 전수한 후 귀국해서는 적극적인 화엄행을 전개하게 된다. 태백산에 부석사를 창건하여 화엄의 근본도량을 삼은 의상은 제자들의 교육과 교화에 전념하였다. 소백산 추동에서 이루어진 90일간의 화엄경 강의시에 제자들이 3,000명 이나 운집했다고 한다. 의상은 실천적 화엄행자로서 제자의 교육에 전념하였기에 의상의 화엄교학은 그 법손들에 의하여 전승되어갔고 교단적 발전을 통하여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화엄십찰(華嚴十刹)이 대를 이어 세워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의상은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의상은 별로 저술을 하지 않았으나(7부) 의상화엄사상을 담고있는 대표적인 현존 저서는 후에 최치원이 솥의 국맛을 맛보는 데는 한 숟갈이면 족하다고 극찬한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이다. 의상의 화엄교학은 일승법계도를 중심으로 왕성하게 연구되었으니, 신라시대 주석서인 [법계도기총수록]에 인용된 사기만 해도 [대기], [법융기], [진수기] 등 다수에 이르고 있다. 일승법계도를 중심으로 하는 해동화엄학의 그러한 학적 전통은 그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의상은 화엄이 일승원교에 속하며 법계도는 그 일승원교의 종요(宗要)를 드러낸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일승법계도는 자리행, 이타행, 수행 등 행문을 밝혀, 수행에 귀착되는 구조를 띠고 있다. 이러한 법계도의 실천적 구조는 의상의 화엄성기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다. 법계도의 화엄성기사상은 그의 법성관, 구래성불설(舊來成佛說), 해인삼매론 등을 통하여 드러나고 있다. 법계도의 골자가 되는 법성(法性)은 성기(誠起)의 다른 표현이다. 의상은 범부 오척신의 부동인 무주(無住)를 법성이라 하며, 이 무주 법성을 법신 자체라고도 한다. 불가설인 법성이 가설인 진성으로 대체되어 연기분이 성립하므로 연기의 근본체는 성기이다. 따라서 행자는 부처님의 선교방편에 인도되어 원융법성의 본제에 되돌아가니, 이것이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로 결론지어져 있다. 그리고 구래불은 십불(十佛)로 출현하니 이 구래성을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라는 상즉상입의 도리에 의해서도 나타내고 있다. 구래불인데 발심함은 발심 때에야 정각임을 알기 때문이다. 십불세계에 깨달아 드는 데는 발심이 근본이 됨을 강조하고 있다. 실천수행을 통한 중득의 세계가 곧 십불의 현현이요, 구래불의 성기세계이다. 또 연기법이 성기에 근거한 것은 삼종세간의 일제제법이 해인삼매 속에 나타남에 비유되고 있다. 해인은 여래의 보리해로서 법성을 중득함에 의해 들게 되는 과해인이다. 의상은 삼국통일의 평화와 화합을 원융 법성으로 이끌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런데 실천적 의상화엄의 중요한 또 하나의 특징으로는 정토 신앙을 화엄철학에서 끌어내고 있는 엄정융회(嚴淋擔會)의 사상이다. 백화도량발원문 등 의상의 발원문류에는 미타정토신앙의 화엄적 수용을 볼 수 있다. 해동화엄학의 근본도량인 부석사에 무량수불을 모신 것이라든지 낙산에 관음진신주처 도량을 개설하는 등, 의상의 마타 관음신앙은 그가 실천적인 화엄교단을 건설한 것으로 해석된다. 화엄의 관념체계가 너무 고답직이어서 일반 민중이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민중을 향한 의상의 뜨거운 우국충정의 모습은, 오랜 전란과 토목공사 등으로 재정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속에서 또 축성을 하려는 문무왕의 경성축성(680)을 말린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러한 화엄신앙과 사상은 의상의 제자, 특히 불국사 주지 표훈을 비롯한 십대제자(표훈, 진정, 상원, 양원, 오진, 지통, 진장, 도응, 능인, 의적)에 의해 전승되어 신라화엄의 주류를 형성했다. 그러나 의상에게 법장의 편지와 주석서들을 전했던 승전, [해인삼매론]의 저자 명효, 80화엄을 전래한 범수 등을 비롯해 비의상계 화엄학승들도 많았다. 오대산의 문수신앙을 확립한 보천 효명 태자도 빠뜨릴 수 없는 화엄신앙의 기수이다. 결국 신라말에 이르러 남악南岳)과 북악(北岳)의 양대맥으로 갈라지게 되었으니 남악의 관혜는 견훤의 복전이고 북악의 희랑은 왕건의 복전이었다 한다. 그러나 고려 초에 의상을 이은 북악계의 균여에 의해 다시 재통일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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